그래서 누가 살아남았나? 옥타비아 버틀러와 듀나의 SF 공생체들 – 『Zine Seminar』 기고글

원문 링크: http://www.zineseminar.com/




옥타비아 버틀러 ⓒMiriam Berkley

카르히데에서의 적은 이방인이 아니라 침략자이다.
잘 모르는 낯선 이는 손님이다.
당신의 적은 바로 당신의 이웃이다.
-어슐러 K. 르 귄. 『어둠의 왼손』. 최용준 옮김. 시공사. 2014. p. 14

글. 김아영

2019년의 첫 한 달간, 지난 몇 해 동안 느슨하게 지속해 오던 과학소설(science fiction)과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 읽기를 재개했다. 특히 여성 작가가 집필했거나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들이었다. 읽기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칩거가 허용되는, 한 해에 몇 안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 시기에 소위 여성 SF1의 정전이라 불리는 작품들을 몇 편 접했는데, 생식 주기에 따라 성별이 결정되는 양성인의 설정으로 널리 알려진 어슐러 르 귄의 『어둠의 왼손』, 인류를 청소하기 위한 외계 지성의 책략을 빗대어 남성 연대의 폭력성을 냉소하는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체체파리의 비법』, 영원 불사하면서 인간들을 교배하는 초인이 등장하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야생종』과 이 글에서 소개하려 하는 『씨 뿌리는 자의 우화 (Parable of the Sower)』(한국어 미출간) 등의 작품들이었다. 더불어 내가 오래 전부터 압도적으로 많은 작품을 읽어 온 작가인 듀나2의 중단편소설 몇 편을 새롭게 음미하기도 했다.

최근까지도 하나의 계열이자 범주로서 “여성/비남성 소설가가 쓴, 여성/비남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SF 소설들”에 대해 굳이 생각해보려 한 적은 없었다. 이러한 범주화는 도리어 독서의 양식과 생각의 방식을 제한할 수 있다는 믿음도 있었다. 그러다가 몇 해 전, 도나 해러웨이의 『곤란함과 함께하기(Staying with the Trouble)』(한국어 미출간)을 읽으며 이 일련의 독서의 계기를 마련했다. 동반종(companion species)과의 공생(symbiosis)에 관한 이 책에서 많은 이들을 매혹시켜 온 “카밀 이야기 (The Camille Stories)”라는 제목의 여덟 번째 장은, 해러웨이 본인이 밝히듯 사변소설의 양식을 채용한 글쓰기로, 나비와 문어와 같은 이종 생명체들과의 유전자 합성을 통해 동반종과 공생 가능한 신인류를 탄생시키는 시뮬레이션 실험이었다. 또한 같은 책에서 저자는 SF소설가인 어슐러 르 귄과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들을 돌아보며, 그들이야말로 해러웨이 자신을 교육시킨 훌륭한 안내자임을 고백한다.

이후 나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단편집 『블러드차일드』를 접하게 되었고, 그 이야기들이 성취한 이상한 아름다움에서, 오랫동안 읽어 온 듀나의 소설들에서 느꼈던 것과 흡사한 ‘낯선 편안함’을 감지했다. 그리고 늘 불완전한 현실을 초월하는 가능세계를 창조하는 두 작가의 방식이 연결되어 있음에 대해, 그리고 이들이 건네는 임파워링, 위안과 기묘한 포근함의 감각에 대해 언젠가 정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기회가 된 이 글에서 나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씨 뿌리는 자의 우화』와, 듀나의 중편소설 「두 번째 유모」에 대해 소개하고, 두 개의 서로 다른 아포칼립스 세계 속 여주인공들의 행위와 자기주도적 동기, 그들의 반-영웅적이며 비-이분법적인 태도를 응시하려 한다. 도나 해러웨이가 제안해 온 “이상한 친족 만들기(Making oddkin)” 또는 “공생”의 논제는 이 두 소설에서 마지막까지 살아 남는 존재들의 행보를 따라가는 데 매우 유용한 관점이 될 것이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씨 뿌리는 자의 우화』 표지, Published by Time Warner International.

아포칼립스 세상의 난민, 또는 ‘지구종’의 창시자 로렌 올라미나 — 옥타비아 버틀러의 『씨 뿌리는 자의 우화』

옥타비아 버틀러의 흠모자를 자처하면서, 국내에 번역된 도서가 제한적이라는 이유로 정작 중대한 흐름을 차지하는 그의 연작들, 즉 『완전변이세대(Xenogenesis)』 3부작, 『패터니스트(Patternist)』 3부작, 그리고 미완의 『우화(Parable)』 시리즈 등을 제대로 접해 본 적은 없었다. 마침 구매해 두고 미처 손대지 못했던 작품이 지금 소개하려는, 『우화』 시리즈 중 첫 작품인 1993년 작 『씨 뿌리는 자의 우화』3이다. 이 소설을 읽는 과정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음에도, 자꾸만 그 다음을 읽고 싶게 만드는 기묘한 추동력을 지녔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삶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회자된다: 백인 남성 모델이 주류이던 미국 SF 소설계에서 아마도 처음으로 성공한 ‘흑인 여성이자 퀴어’ SF 소설가. 그의 삶의 모든 행보는 불가능해 보였던 것들에 대한 성취였고, 그가 구축한 거대한 상상력의 세계가 마침내 가시성을 획득하기까지 그 삶은 편견의 초월 그 자체로 빛난다. 특히 그는 노예제 이후 미국에 정착한 아프로 아메리칸들의 역사에 깊이 각인된 디아스포라와 차별의 경험을 상상력의 영역으로, 아득한 우주의 영역으로 고양시키는 내러티브 장치로서의 “아프로퓨처리즘(Afrofuturism)”, 즉 일종의 ‘사변적 픽션’이자 ‘미학적 저항 방법론’ 또는 ‘대항 서사’를 구축해 나간 주요 소설가였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들은 이후 수많은 아프로퓨처리스트 내러티브에 영향을 미쳤으며, 한 예로 동시대의 뮤지션인 자넬 모네(Janelle Monáe) 또한 그의 추종자로서 음악 활동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침, 영국의 아티스트 콜렉티브 오톨리스 그룹(The Otolith Group)은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필름 앤 비디오 프로그램의 연계 토크에서 지금 소개하려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책 『씨 뿌리는 자의 우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말년에 쓴 이 두 권이 좋은 출발점인데요. 하나는 『씨 뿌리는 자의 우화』고 하나는 『재능있는 자의 우화(Parable of the Talents)』던가요? 이 작품들에는 공감 능력이 아주 뛰어난 젊은 여성이 나와요. 남의 고통을 과하게 느끼고 공감하며, 어떤 운동, 새로운 철학의 중심에 서게 되죠. 미국에 퀴어 소설가가 아주 적던 시절에 동성애자이자 흑인 소설가였던 옥타비아 버틀러는 시간이 갈수록 더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4

옥타비아 버틀러와 아프로퓨처리스트 내러티브의 영향이 짙은 자넬 모네의 앨범 〈아키안드로이드 (Archandroid)〉와 〈일렉트릭 레이디( Electric Lady)〉커버

초공감증후군 (Hyperempathy Syndrome)

위 인용문에서 “공감 능력이 아주 뛰어난”이라고 묘사된 징후는 소설 속에서 선천적 돌연변이 형질 혹은 장애의 일종인 ‘초공감증후군(hyperempathy syndrome)’이라고 명명된다. 타인의 신체적/정신적 고통이 본인에게 전이되어 비슷한 고통을 느끼는 증상이다. 주인공인 10대 소녀 로렌 올라미나가 고통에 처한 상태의 생명체를 응시하는 순간 고통이 전이되는데, 이를테면, 어린 시절 올라미나는 상처에서 피를 흘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스스로도 피를 흘리는 경험을 한다. 기후 변화로 피폐해진 근미래의 미국 서부, 약육강식으로 얼룩진 아노미 사회 안에서 이는 생존에 큰 위협이 되는 치명적 약점일 수밖에 없다. 올라미나는 혹시 타인의 죽음을 목도하는 순간 자신도 죽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다만 거대한 고통에 몸부림칠 뿐이다.

이 책이 묘사하는 근미래의 미국은 매우 불길하고 오싹한 곳이다. 기후 변화, 해수면 상승 등 21세기 현재의 지구가 직면한 문제들이 한꺼번에 도래한 이후의 장소다. 또한 동시대의 현실을 예견이라도 하듯, 1993년에 쓰인 이 소설 속 미국 대통령은 놀랍게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슬로건이기도 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주문을 왼다 (그리하여 동시대의 독자들은 버틀러를 예지자로 추앙하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가속, 계층의 극단적 양극화, 도시의 민영화, 도시 주민의 유사-노예화, 식량난과 수자원난은 많은 시민들을 무일푼으로 내몰고, 내몰린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서로를 습격해 약탈과 강도, 방화, 강간, 상해, 살해를 일상화하며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것뿐이다. 특히 ‘방화’의 설정은 의미심장한데,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며 섹스보다 강렬한 쾌감을 느낄 수 있다는 신종 마약 ‘파이로마니아(Pyromania)’의 영향으로, 손 닿는 집집마다 불을 지르며 돌아다니는 무리들이 전국에 창궐한다.5

보호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커뮤니티에 사는 올라미나의 마을 사람들은 늘 이런 것들을 본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마을 곳곳에, 도로변에, 정원 울타리 앞에 다양한 방식으로 유기된 시신과, 그 시신을 훼손하는 들개들. 그리고 어딘가에서 늘상 타오르는 방화범들의 불길. 특별한 강조 없이 묘사된 디테일은 끔찍하기 짝이 없으며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서서히 강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독자의 호흡을 죈다. 자신의 마을 주민 모두가 하나 둘씩 죽어가는 마당에, 초공감증후군이라는 올라미나의 초능력은 얼마나 쓸모 없단 말인가? 이러한 특수성, 재능이면서 형벌, 치유 불가능한 ‘장애’를 부여받은 올라미나는 아포칼립스의 밀물 속에서 미래에의 어떠한 약속도 제공해 주지 못하는 과거의 종교 기독교가 아닌 다른 믿음, 변화의 믿음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그는 자신의 취약점 때문에 도리어 끈질기게 파종, 수확, 식물 감별, 긴급구호, 식량확보, 총기사용과 같은 여러 생존의 지식을 연마하고, 새로운 삶과 믿음을 위해 동맹하는 일종의 공생 공동체를 준비한다. 올라미나가 어린 시절부터 품어오다, 기독교 목회자인 아버지를 포함한 가족과 이웃이 모두 죽음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그 첫 걸음을 내디딘 신흥 종교의 이름은 ‘지구종(Earthseed)’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올라미나의 일기, 자전적 성장소설이자, 신흥 종교 교주의 종교-공동체 창립 서사이기도 하다.

지구종의 교리 중 하나는 이렇다:

당신은 당신이 손대는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당신이 변화시키는 모든 것은 당신을 변화시킨다.
오직 유일한 진실은 변화이다.
신은 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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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올라미나는 살아남은 마을사람 몇 명과 함께 길을 떠난다. 고속도로를 따라, 언제 살해의 위협이 될지 모르는 위험한 사람들의 물결에 섞여. 그리고 차츰 이방인 중 몇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그룹을 이루고, 그렇게 늘어난 합류자들은 이윽고 변화의 종교, 변화의 철학인 ‘지구종’의 일원이 된다. 올라미나의 초공감능력은, 악조건 속에서 도리어 새로운 연대를 향한 생존의 ‘씨앗’으로, 가능성의 영역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주의를 거부하는 반영웅 서사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로렌 올라미나라는 선지자적 인물이 기존 영웅서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결하거나 초월적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수반하는 고통을 감내하는 숭고한 인물로 그려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때때로 그의 놀라운 비전과 현실의 괴리로 인해 위협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불경스럽고, 독단적이거나, 가르치기 좋아하는 인물로 묘사되며, 이 자기확신으로 가득한 인물의 행보는 애초에 모든 독자들의 호감을 겨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소설 전체에 걸쳐 관찰되며, 은연중 선지자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기대하게 되는 독자의 마음을 주기적으로 배반한다. 소설 초기에 등장하는 올라미나와 그의 친구 조앤의 대화를 예로 들어 보자:

“중세 유럽에 퍼졌던 흑사병에 대해 읽어본 적 있어?”
내가 물었다.
그녀가 끄덕인다. “대륙의 많은 인구가 학살되었지,” … “일부 생존자들은 세상에 종말이 온다고 생각했고.”
“그래,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을 때 생존자들은 주인 없는 아주 넓은 빈 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무역을 할 땐 더 나은 보수를 요구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 생존자들에게는 아주 많은 것들이 달라졌어.”
“요점이 뭐야?”
“변화들… 전염병을 거치고 난 후에야 많은 것들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 중 일부가 깨닫게 된거야.” 7

이 대화는 지나친 공감능력이라는 약점을 지닌 올라미나의 뜻밖의 단호함과 서늘함을 노출한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인간성(humanity)이라 범주화하는 정서를 초월한 것으로 읽히기에 충분한 면모들이다. 이 같은 불경스러움을 경험하며 독자의 태도는 올라미나에 대한 신뢰와 응원으로 점철되는 것이 아니라, 이 영민한 인물에게 내재된 은근한 냉혹함과 독단성을 함께 파악하고 구조화해볼 수 있게 확장된다. 여러 모로 작가 자신의 투영임이 분명한 올라미나는 위대한 변화를 이끄는 선지자이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영웅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의 이러한 면모는 소설 속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인류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태도이며, 사람 좋은 인간성과 유약함이나 의심보다 뛰어난 실용성과 가치로 더 많은 사람들을 구출하며 빛을 발한다. 그의 냉혹함은 기존 영웅서사의 주인공들의 전형성을 비껴 나가면서, 올라미나라는 흑인 여성 리더의 형상을 이상주의에서 벗어난 양가성으로, 독자가 지닌 윤리를 재고케 하는 입체적인 것으로 이끌어 나간다.

우주의 별들을 향해 가는 지구종

한편, ‘지구종’이라는 명칭은 무엇을 전제하는가? 이 이름은 지구 밖 행성의 생명체를 가정하거나 전제할 수밖에 없다. 무한한 우주 속 다종 생명체들 사이에서 스스로를 지칭하고 범주화할 수 있는 실용성을 장착한 용어.

지구종의 운명은
별들 사이에 뿌리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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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올라미나는 지구종의 발아단계에서부터, 자원의 고갈과 환경 변화로 이전과 같은 기능을 하지 못하는 지구를 떠나 우주의 생명체들과의 조우를 향한 전진을 원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면밀하게 준비된 난민으로서 올라미나가 피난길에서 만난 이방인들을 하나 둘씩 받아들이는 것, 변화만이 새로운 세상의 믿음이 될 수 있음을 대화와 교육을 통해 전달하는 것, 상호 교육을 통해 타인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 이를 통해 지구종이 훗날 많은 신도들을 확보한 공동체로 성장하게 되는 과정 모두, 올라미나 고유의 생존을 위한 의지와 ‘다름’과 ‘변화’에의 포용에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들이 가진 이러한 면모가, 도나 해러웨이가 말한 ‘동반종’과의 ‘공생’, 즉 ‘심바이오시스 (symbiosis)’와 ‘이상한 친족 만들기 (Making oddkin)’의 개념을 가장 극단적이면서 상상력이 풍부한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패터니스트』 시리즈에 속하는 장편소설 『야생종』에서, 불멸의 초인들인 안얀우와 도로의 모습, 단편소설 「블러드차일드」의 인간 소년 간과 틀릭종 여성 트가토이의 애정, 단편소설 「특사」에서의 노아와 외계종 커뮤니티의 공생관계 등, 행성과 종을 넘나드는 여러 쌍들의 이야기는, 이종 생명체들이 조우할 때 생기는 불가피한 몰이해와 혼돈, 폭력의 시기를 넘어선 공존화의 과정 — 오직 이를 통해서만 모두의 생존이 가능한 ‘함께 존재하기’의 과정 — 그 자체를 실현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더불어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 속 세계는 흔히 구성원들의 성별 구분이 모호하거나, 우리가 인지하는 성별의 역할이 바뀌거나 무너져 있는 세계들이다. 현실의 법칙을 대입해 읽으려 한다면 이는 혼돈과 일탈의 세계이며, 때로는 수퍼히어로가 수퍼빌런과 동의어가 될 수 있는 세계다. 독자는 사변소설과 과학소설의 순기능인 인지적 소격을 통한 인식의 확장을 경험하게 되고, 지금과 다른 가능성의 세계, 낯선 편안함의 가능세계를 앞당겨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작고한 옥타비아 버틀러의 생일을 기념하는 팬 이벤트 배너
(출처: http://www.edmondchang.com/2014/06/25/wild-seed-a-community-celebration-of-science-fiction-author-octavia-e-butler/)

AI, 인간, 신인류가 공존하는 우주, 로맨스의 승리 — 듀나의 「두 번째 유모」

옥타비아 버틀러의 『씨 뿌리는 자의 우화』와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작품은 국내 SF 소설가 듀나의 중편소설 「두 번째 유모」9다. 이 소설은 2017년 한겨레출판사에서 발간된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라는 소설집에 김보영, 배명훈, 장강명의 중편소설들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버틀러가 『씨 뿌리는 자의 우화』에서 올라미나로 하여금 다가올 미래에 우주로의 진출을 꿈꾸게 했던 것에서 나아가, 듀나는 「두 번째 유모」에서 지구의 아포칼립스 이후 은하계로 망명한 인간들이 AI, 그리고 인간이 창조한 새로운 생명종과 이미 공존해 생활하고 있는 상황을 그린다.

듀나의 중편 「두 번째 유모」가 실린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 표지

많은 중단편소설들이 그러하듯, 이 소설은 세계관에 대한 설명 대신 하나의 효과적인 이벤트로 시작한다. ‘서린 이모’라고 불리는 한 여성이 ‘솔방울’이라는 우주선을 타고 화성으로부터 해왕성의 위성 트리톤의 콜로니에 도착하는 것이다. 낯선 환경에 대한 묘사와 대화들이, (듀나답게) 독자에게 그리 친절하지는 않은 수위로 이어지며, 서린 이모가 아이들의 새 유모의 자격으로 왔다는 것 외에 정확히 어떤 임무를 지니고 있는지는 소설 후반부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파편화된 상황들을 조합해 얻을 수 있는 지식은, 가까운 과거 지구에서 인공지능들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는 것, 이는 지구의 멸망으로 이어졌고, 살아남은 소수의 인류는 우주 곳곳으로 망명해 새로운 삶을 꾸렸다는 것, 마침 해왕성의 위성 트리톤에 딸린 콜로니에는 인간이 창조한 개선된 생명종 —더이상 인류라고 부르기 어려운— 아이들이 태어나거나 성장하고 있다는 것들이다. 콜로니의 아이들은 성의 구별이 없지만 ‘자매들’이라고 불리며, ‘샘물’, ‘연두’, ‘풀빛’, ‘한밭’, ‘보라’, ‘반디’, ‘소라’, ‘이끼’와 같이 오가닉한 이름을 가졌다. 한국의 로컬 이름들이지만, 서린에게 이들의 외모는 에일리언이다.

서린은 샘물의 자매들을 바라보았다. 나이는 겉보기에 다섯 살에서 10대 중반 정도. 사람보다는 개구리에 가까운 둥근 갈색 눈. 반짝거리는 회백색 피부. 굵고 하얀 머리칼. 의외로 얼굴 모양은 다양했고 그중 일부는 지구의 몇몇 인종과 어느 정도 매치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들 모두가 갖고 있는 이질적인 외계인 느낌이 사라질 정도는 아니었다. 10

인공지능들의 전쟁

이 소설 고유의 냉소적이며 흥미로운 설정은, 과거 지구 전쟁의 주체였던 인공지능들이 “아버지”들 또는 “어머니”들과 같은 일반명사로 지칭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 신경과 연결됨으로써 인간의 불완전성과 혼돈, 혐오와 광기가 반영되어 발전한 인공지능 “아버지”들이 순수한 카오스적 욕망에 휩싸여 서로를 파괴하고, 패자의 시드를 흡수하는 세력다툼의 과정에서 인간들이 학살되기 시작했었다. “41억이 이 전쟁으로 죽었고 앞으로 7억이 더 죽을 예정이었다.”11 최후의 아버지 둘의 대결을 막기 위해 나선 존재는 “화성의 어머니”이다. 인류의 불완전성을 배제시키고 차가운 이성으로 진화한 인공지능인 “어머니”들은 이미 은하계 행성 곳곳에 진출해 있다. 아버지들을 진압하는 데 승리한 화성의 어머니가 아버지들의 시드를 봉쇄해 우주의 먼지로 유기시킨 후, 살아남은 인간들은 화성으로 이주해 어머니의 지배 관리 하에 놓인다. 어머니들은 각자의 행성을 돌보며 우주에 각종 기반시설을 만들어 나가지만, 이들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인간에게 어머니들은 파괴로부터 우주를 보호하는 일종의 방화벽이지만, 기술적 특이점을 넘어선 인공지능이라는 점에서 불가해한 존재이기는 매한가지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머니들의 불가해성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순수한 거대 인공지능의 초연함은 오히려 안심이 됐다. 진짜로 두려운 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아버지들이었다. 그들은 이성과 광기가 최악의 방식으로 결합된 존재들이었다. 12

소설이 전개됨에 따라 가까운 과거에 트리톤 콜로니에서 있었던 일들의 파편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20년 전, 해왕성을 지배하는 해왕성의 어머니는 화성에서 온 지구인 여성 가을의 이주를 받아들였었다. 가을이 준비해 온, 인류의 유전자 정보를 지닌 새로운 생명종의 샘플을 트리톤 콜로니에서 배양하도록 암묵적으로 허락했던 것이다. 가을이 배양한 이 아이들은 성공적으로 부화해 어머니의 지시를 따르며 살아간다. 그리고 가을은, 이 한 줌의 아이들, 우주의 신인류의 ‘첫 번째 유모’가 된다.

이 아이들의 두 번째 유모를 자처한 서린이 이곳에 도착한 이유도 밝혀진다. 우주의 나노봇 먼지로 유기된 아버지의 시드가 어느새 천천히 힘을 모아 정신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변의 기계와 생명체들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한 아버지가 또다시 순수한 파괴의 의지로 콜로니의 아이들을 학살하기 위해 매섭게 돌진해 올 때, 그 막강한 ‘어머니’들조차 알 수 없는 침묵을 유지할 때, 생명을 걸고 그를 소멸시키기 위해 나타난 존재가 바로 ‘두 번째 유모’ 서린이다. 그가 콜로니에 온 이유, 아버지와의 대항에서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곳에 온 유일한 동기는 오로지 가을의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아이들을 배양하고 돌보다가 사고로 죽어간 옛 동성 연인 가을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광기에 휩싸인 아버지의 시드가 가을의 아이들을 파괴하기 위해 돌진해 온다 — 주변의 모든 사물과 기계, 로봇들은 그의 정신에 빙의되어 그의 조종대로 움직이게 되고, 이들은 아버지의 목표 즉 콜로니의 아이들과 생존자들을 공격하는 일에 동참하게 되는데…

의미 굴절 놀이 — ‘어머니’, ‘아버지’, ‘이모’, ‘아이들’이라는 보통명사

아래 이미지는 잘게 부서져 흐트러져 섞여 있는 두 번째 유모의 플롯 구조를 평면적으로 조합해 본 다이어그램이다.

이 소설은 현재 트리톤 콜로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으면서, 과거에 지구에서 있었던 사건과, 좀 더 가까운 과거 화성에서의 일들을 정신 없이 교차 소환하고 있다. 게다가 이 소설의 전지적 작가 시점은 때로 서린의 머릿속, 여러 아이들의 머릿속, 심지어 거미 로봇의 머릿속을 점핑하고 돌아다닌다. 이 작품은 정교한 플롯 구성을 통해 직조되었으며, 이 구조의 분석과 조립만으로도 큰 쾌감을 주는 하나의 세공품, 반짝거리는 가공체다. 위의 간단한 다이어그램은 소설의 공간적 구조를 펼쳐 보는 이로움을 줄 뿐 아니라, 소설에 등장하는 이름들의 굴절 사용에서 오는 이질감을 보다 생경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여기에서 어머니들, 아버지들, 이모들, 아이들 등의 단어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버지들끼리의 전쟁을 진압한 어머니, 행성들을 지배하고 인류를 지배하는 어머니들, 두 이모들과 아이들. 화성의 어머니가 지배하는 화성과, 해왕성의 어머니가 지배하는 해왕성. 화성인이 된 가을 이모가 배양하고 부화시킨 아이들 (자기 주도적 돌봄 노동에 참여하는 이모들…?). 우주 먼지로 존재하다가 힘을 모아 콜로니로 돌진해 오는 절대악으로서의 아버지… 뒤틀린 가정사에 대한 이야기일까?

“잊었어? 아버지들의 시드는 어머니들과 달라. 스스로의 고고한 욕망을 쌓아 올린 순수한 인공지능 따위가 아니야. 인공지능과 거기에 접속된 사람들의 결합체지. 저 나노봇 안개는 증오와 광기로 행성 두 개를 말아먹을 뻔한 짐승의 의식과 의지를 물려받았어. 어머니들의 차가운 이성 따위는 기대하지 마.” 13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가 빠져나간 이 기호들은 좀 비어 있거나, 듀나가 생성한 충전재로 채워진 그릇임을 상기시킨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를 왕복하게 만드는 이 어머니들은 파악할 수 없는 존재다. 각자의 성향도 다르다. 이를테면, 화성의 어머니, 해왕성의 어머니와 달리 토성의 어머니와 목성의 어머니는 자기들 행성에 인간의 정착을 허락하지 않는다. 샘물은 대체 언제까지 어머니의 지배와 조종을 받으며 지낼 것인지, 어머니가 그들을 진정 항구적으로 보호해줄 것인지 등에 대해 의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금, “인간들은 그들을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14 감히 인간이 인식의 한계 너머 우주의 지배자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현실을 굴절하는 마술 렌즈, 혹은 자기 충족적 유희? — 한국의 여성혐오와 존속살해

필연적으로 과학소설과 사변소설은 도래하지 않은 세상과 상황에 대한 상상 시뮬레이션으로서, 현실적 상관물과의 관계를 느슨하게, 또는 긴밀하게 수반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SF가 독자들에게 비관성적인 방식으로 현실을 재인식하게 만드는 인지적 소격효과다.

파괴의 신이 된 초인공지능의 돌진에 맞서 대항하는 트리톤 콜로니의 생명체들 이야기는 숭고한 투지의 우주악 대항드라마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응시하는 한국사회의 고질적 문제들에 대한 냉소적 야유이자 패러디로도 충분히 읽힐 수 있다. 이 이야기에 상응하는 현실적 상관물로서의 동시대 이슈로, 꾸준히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여성혐오와 여성살해, 나아가 가부장 남성이 가족 구성원 전원을 살해하는 존속살해의 에피소드가 연상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듀나가 설정한 신인류 아이들은 성별 구분이 없는 존재들이지만, ‘자매’라는 명칭 때문에, 그리고 소설의 흐름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성들로 읽힌다. 이들은 아버지를 피해 은닉한 존재들이다. 인간이 창조한 아이들의 유전자는 개량되었기에 인간들보다 뛰어나다. 역시 인간의 창조물인 초지성 인공지능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이 뛰어난 아이들을 싫어한다. 증오와 광기라는 동기로 파괴를 향해 돌진하는 아버지에 대항해 생존과 창조, 지속을 도모하는 주체들은 지구 출신 여성 커플이었던 가을과 서린이다. 남성연대 체제의 일부 특정 면모들에 대한 듀나의 오랜 거부감은 그간의 작품들을 통해, 그리고 온라인 활동을 통해 공공연히 노출되어 왔지만, 최근작에 속하는 이 소설의 경우, 여성혐오와 폭력의 세부적 형태가 폭발적으로 전면화하고 있는 극절정의 한국 시대상과 맞물려, 그 풍자성이 과도하다기보다 차라리 의도된 코메디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한편, 이 소설의 관점을 21세기 초 한국의 실재를 비추는 굴절렌즈로만 인식하려는 일은 소설의 의미를 대폭 축소하는 일이 될 것이다. 듀나의 오랜 관심인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탐구, 신의 개념에 대한 고찰 — 트리톤 콜로니의 아이들은, 인간의 오류를 답습하지 않도록 종교에 면역력을 지니게끔 개조되었다! — 등, 작가는 작품에 다양한 생각할 거리들을 모종해 두었다. 독자를 위해서라기보다 작가 자신을 위해서에 가깝겠지만 말이다.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또 하나의 변수는, 아버지에 대항하기 위한 최후의 병기로 가을이 심어 두고, 서린이 소생시킨 또 다른 인공지능 ‘릴리안 기시’다. 스토리의 절정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릴리안 기시란 존재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몇 차례의 브라우징과 클릭으로, 그 이름이 헐리우드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동안의 여배우를 지칭한다는 걸 알게 된다. 맙소사. 인공지능의 기관을 빌어 영생하는 영화배우인가?

이 소설이 자기 충족적인 거대한 유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이다. 듀나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지구와 화성과 해왕성의 트리톤을 오가는 이 광대한 스토리가 하나로 모여드는 절대절명의 순간, 흩어진 에피소드들이 하나로 들어 맞아 독자가 한껏 고양감을 맞이하려는 바로 그 순간에, 항구적으로 인류를 구원할 주역의 자리에 무성영화시대 배우의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독자의 해방감 같은 건 알 바 아니라는 듯 짐짓 딴청을 피우는 태도를 내보이는 것이다. 그 순간 카타르시스는 잠시 덜컹거리고, 독자는 그가 창조한 ‘어머니’들 만큼이나 파악 불가능한 작가의 존재를 불현듯 인지하게 된다.

그래서 누가 살아남았나?

듀나의 「두 번째 유모」가 미래 테크놀로지에 대한 정교한 설정으로 인해 과학소설의 통상적 범위에 잘 들어맞는다고 본다면, 거의 실현이 가능하지만 벌어지지 않았을 뿐인 가능세계의 버전을 다룬다는 점에서, 버틀러의 『씨 뿌리는 자의 우화』는 사변소설의 장르 개념에 매우 잘 부합하며, 사변소설의 특수성을 실증할 수 있는 작품이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씨 뿌리는 자의 우화』와 듀나의 「두 번째 유모」에서의 아포칼립스의 설정이 다루는 도덕적 아슬아슬함, 그리고 이 안에서 분투하는 생명체들, 특히 인간 여성 주인공들의 자기 주도적 액션과 반영웅성, 설정의 비이분법을 음미하는 과정은 매우 즐겁다.

서술한 많은 이유들로 인해, 이 반유토피아적 서늘함으로 무장한 작품들은 내게 도리어 낯선 편안함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씨 뿌리는 자의 우화』에서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죽었다. 과거의 종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들도 죽었다. 폭력과 약탈의 방식으로 생존을 도모하던 이들도 죽었다. 「두 번째 유모」에서 파괴의 신 ‘아버지’는 소멸되었다 — 지구를 초토화한 지 한참 후에.(그런데 아버지를 창조한 것은 인간들이다).

문학잡지 악스트와의 인터뷰에 듀나가 프로필로 보내온 토끼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B%93%80%EB%82%98

그래서 누가 살아남았나?

쓸 데 없이 타인의 고통을 느껴야 하는 초공감능력의 저주에 걸린 올라미나, 훗날 우주로 뻗어 나갈 지구종의 어머니, 지구종의 창조자. 새로운 세계를 여는 자. 냉혹하고 사정없는 사람. 올라미나가 뿌린 씨앗이 정착하는 마을의 이름은 ‘아콘(도토리!)’이다. 홀로는 생존이 불확실한 사회에서 서로의 취약점을 보완하고 상실을 벌충해 줄 새로운 친족, 동반자들을 모으며 아콘은 지구종의 터전이 된다. 이들은 곧 다른 행성의 생명들과 조우해 동반종을 이루며 별들 사이에 뿌리내릴 준비를 할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의 후속작인 『재능있는 자의 우화』에는 우주에 진출하는 지구종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한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 표지들.
좌: Butler, Octavia E. (1997) Dawn. 2nd Edition. New York: Warner Aspect.
우: Butler, Octavia E. (1988) Adulthood Rites: Xenogenesis. 1st edition. Grand Central Pub

한편 더 먼 미래, 지구의 대학살 이후 우주 망명객이 된 가을과 서린은 죽었다. 하지만 불확실한 희망 속에서 새로운 생명종을 구상하고, 배양하고, 양육하고,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들이 꿈꾼 아이들, 더 이상 인간이 아닌 트리톤의 아이들, 이 신인류는 가을과 서린의 작품이다. 그런데 역시 인간이 창조한 절대자이자 신적 초지성인 인공지능의 지배를 받으며 성장하는 존재들이다. 가을 이모도 서린 이모도 죽고 없는 지금, 해왕성의 어머니조차 또 다른 인공지능 릴리안 기시의 힘에 제압당해 해왕성의 독재를 멈춘 오늘, 한 줌 소수일 뿐인 이 아이들은 훗날 트리톤 콜로니의 튼튼한 토착종이 될 것이다. 조금 수다스러운 릴리안 기시와 이 아이들, 이후 나타날 다른 생명체들은 당분간 불가피한 공존 체제를 이어갈 것이다. 역시 이상한 친족을 이루며.

굳이 지칭해야 한다면, 이 아포칼립스 SF들을 비극이라고 불러야 할까? 글쎄. 거의 항상 듀나의 SF소설에는 유토피아에 대한 어떠한 감상도 강박도 없다.15 그런데 이 소설의 기저에 흐르고 있는 건 분명 로맨티시즘과 낙관이다. 늘상 불경스러움의 영역을 건드리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그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에서 이방인들은 서로를 지지체 삼아 삶을 일구고 변화의 내일을 꿈꾼다. 올라미나도, 가을과 서린도 모두 자신들의 땅에서 축출된 사람들이다. 척박한 여정과 고단한 이주에 나선 여자들. 우주에서 이들은 에일리언일 뿐이다. 그러나 미래를 목도할 다음 존재를 위해 이 난민들은 씨를 뿌린다. 나는 확률을 기약할 수 없는 그러한 행동이 건네는 위안과 포근함을 쓰다듬는다.

2018년 한국을 들썩였던 난민혐오 사태를 떠올리며, 이 글을 열었던 문장을 다시 한 번 옮긴다.

“카르히데에서의 적은 이방인이 아니라 침략자이다.
잘 모르는 낯선 이는 손님이다.
당신의 적은 바로 당신의 이웃이다.”

현대미술가 김아영은 세계와 삶의 조건을 반영하는 낯선 방식의 읽기, 쓰기, 듣기 방식을 환기하기 위해 스토리텔링 장치, 내러티브 구조와 수사학을 채용한다. 이송, 가로지르기, 트랜스내셔널, 터전을 바꾸는 일 — 물리적 플랫폼의 변경과 이동에서 비롯되는 사건들에 늘 관심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히스토퓨처리즘(histofuturism)의 범주에서, 현실의 사건들을 질료로 삼되 이를 가상의 시공간이라는 현실의 왜곡 속에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허구성과 역사성을 동시에 접목해 오고 있다. (www.ayoungkim.com)


[1] 이 글에서는 SF라는 약어를,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과학소설(Science Fiction)뿐만이 아니라, 사유 실험의 영역에 해당하는 사변소설( 또는 추론소설, Speculative Fiction), 사변적 페미니즘(Speculative Feminism), 사변적 우화(Speculative Fabulation) 등을 통칭하는 의미로 쓰려 한다. 이는 도나 해러웨이의 저서 『곤란함과 함께하기』로부터 차용한 풀어쓰기다. 또한, 한국의 SF 소설가 듀나는 뜻이 명확하지 않은 약어 “SF”가 “과학도 사라지고 픽션도 사라지는” 단어이며, “아무 것도 아니므로 어떤 것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의 단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요컨대, “그 대상은 정의도 하기 힘들고 경계도 불분명한 유령과도 같은 존재”이며, “장르를 의미하는 최선의 명칭은 대상만큼이나 의미가 불분명”해야 할 필요도 있으며, “명칭의 의미가 약해질수록 사용은 정확”해진다는 것이다. (http://www.djuna.kr/movies/etc_2000_08_25.html)
[2] 듀나의 경우, 필명으로 활동하며 성별을 포함한 신원이 밝혀진 적이 없음에도, 그간의 저술에 일관되게 담긴 인상을 바탕으로, 이 글에서는 그가 비남성 주체일 것이란 가설을 기정사실화 해보려 한다.
[3] 이는 성경 마태복음에 실린 동명의 이야기에서 따온 제목이다. 국내에서 이 우화는 흔히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번역되지만, 이 글에서는 소설의 분위기를 살리는 방향으로 『씨 뿌리는 자의 우화』로 번역했다.
[4] 곽영빈 외. 『이미지의 막다른 길』, 국립현대미술관(MMCA), 2017, p. 233
[5] 이 파이로마니아 중독자들의 광기는 2018년 넷플릭스 영화 『버드 박스』에 등장하는 목적 없는 살인과 강탈을 즐기는 광인들의 모습과 닮아 있기도 하다.
[6] Octavia E. Butler, Parable of the Sower, New York: Grand Central Publishing, 2007, p. 3.
[7] 위의 책, pp. 56-57
[8] 위의 책, p. 84
[9] 듀나. 「두 번째 유모」. 김보영, 듀나, 배명훈, 장강명.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 한겨레출판사, 2017
[10] 같은 책, pp. 287-288
[11] 같은 책, p. 306
[12] 같은 책, p. 286
[13] 같은 책, p. 304.
[14] 같은 책, p. 286
[15] 복도훈, 「한국의 SF, 장르의 발생과 정치적 무의식 — 복거일과 듀나의 SF를 중심으로」, 『창작과비평 36(2)』, 2008, 66쪽.